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8월 종파사건 (문단 편집) ==== 전후 복구 방향에 대한 이견 ==== 북한은 [[6.25 전쟁]] 당시 UN군의 폭격으로 폐허가 되어있었다. 중요 도시인 [[평양시]], [[원산시]]를 비롯해 각종 인프라 시설들이 폭격으로 인하여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북한은 종전 직후부터 공산 국가들, 주로 소련과 중국의 원조를 받아 전후 복구를 시작하게 된다. 하지만 공업화에 집착한 김일성의 구상에 대해서 소련은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으며, 북한 내부에서도 중앙은행 총재 김찬을 비롯해서 일단 인민들을 먹여살리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한 인물들이 있었다. '민생 개선을 위한 경공업 우선 노선'과 '국력 신장을 위한 중공업 우선 노선'의 충돌은 20세기 이후 [[개발도상국]]에서 [[신흥공업국]]으로의 이행을 겪은 나라 대부분에서 나타난 현상이다. 가능한 한 빨리 산업(공업)기반을 확충해야 하는 상황에서 제한된 자본을 어느 영역에 우선적으로 투입할 것인지를 두고 벌어지는 갈등인데 이 갈등을 겪지 않았다면 1)현대와 같이 산업구조가 고도화되기 이전, 19세기 무렵에 이미 산업화가 진행되어 축적된 자본을 통해 비교적 여유있게 산업구조 발달을 감당했을 것이다. (이 부류에 속하는 국가들은 대부분 제국주의 시대에 이미 열강의 지위를 얻어 현재까지 선진국의 지위를 가지고 있는 국가들이다.) 2)아직 산업기반이 확충되지 않은 상태인 저개발 국가일 가능성도 있다. (국제적 투자의 규모가 거대해지고 산업구조가 더욱 발달한 20세기 후반~21세기 이후에는 새로운 산업화 발전 모델의 등장 가능성이 엿보이고 있기는 하나, 이에 대해서는 아직 평가하기 어렵다.) 가까이는 산업화 시기의 한국 역시 비슷한 사례를 겪었고 멀리는 러시아 혁명 직후의 소련 역시 일국사회주의론과 연속혁명론의 충돌에서 이 문제가 중요한 논점이 되었다. 그리고 북한의 사례에서 이 갈등이 보인 특수한 양상은 이것이 단순히 국내 경제 노선 갈등이 아니라 정치외교적 대외 노선의 방향에 대한 갈등의 영역에 걸쳐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동구권(공산주의 진영) 구성 국가의 상당수는 사실상 소련의 위성국가였고, 이 때문에 동구권 내에서 소련의 영향력은 서구권(자본주의 진영) 내에서 미국의 영향력보다 훨씬 강력했다. 이를 근거로 이후 [[브레즈네프 독트린]] 등의 제한 주권론이 등장하기도 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국제적 혁명을 주장하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념이 이런 노선을 이념적으로 뒷받침했다. 그리고 이 당시의 소련은 자국의 강한 영향력과 그에 기반한 진영 내부의 높은 통일성 및 유기적 연합성을 근거로 일종의 '공산주의 국제 분업'을 지향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각 국가가 각각 독자적으로 산업을 육성할 경우 진영 전체로 보면 심한 중복투자가 일어나게 되니 각 국가마다 유리한 분야를 찾아 그 분야를 집중적으로 육성하자는 것. 즉 한 국가 내에서 이뤄지는 지역별 특화 산업 육성을 국가를 넘어 진영 전체 단위로 하자는 말이었다. 당시 서구진영에 비해 경제력 및 생산력이 열세이던 동구권의 입장에서 최대한 효율적으로 서구권에 맞설 수 있는 경제적 역량을 구축하기 위한 계획이었기는 하나, 실현이 어려운 무리수에 가까웠던 점 역시 이를 통해 알 수 있다. 한 나라 안에서도 특정 지방에 고부가가치 산업이 집중되면 다른 지역에서는 자기 지역이 소외되었다는 불만이 터져나오는데, 지방자치단체도 아니고 (위성국이라곤 하지만) 주권을 가진 국가 사이에서야 필연적으로 기술집약적 중공업을 가져간 나라가 광업이나 농업 등 저부가가치 산업을 가져간 나라에 갑질하려 한다는 불평불만이 터져 나올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 구상에서 북한이 이미 상당한 산업기반을 갖춘 동유럽 국가들을 제치고 중공업이나 기술집약산업을 배정받기는 어려웠다. 만약 이 구상이 실현되었다면 북한에 배정될만한 산업은 [[북한/지하자원|지하자원]]을 기반으로 한 광업 및 (평야는 부족하지만) 자급자족을 위한 농업, 경공업 정도였을 가능성이 높다. 정치적으로는 극동에서 일본/남한을 거점으로 하는 미국을 상대하기 위한 군사적 거점 역할을 기대할 수 있고, 이를 위해 제한된 중공업 육성이 이뤄졌을 가능성도 있으나 북한 바로 옆인 만주에 일제가 건설한 공업 기반들이 있는 상황에서 중공업에 대한 투자가 크게 이루어질 것이라 기대하긴 힘들었다. 어쨌든 공업복구는 차근차근 이루어졌지만 농업을 경시하는 식으로 계획을 잘못 짜는 바람에 농산물 보급에 차질이 생겨 1955년 봄에 보릿고개가 닥쳐오면서 굶어죽는 사람들까지 속출했고, 이 때문에 김일성이 위기에 처할듯 싶었지만 김일성은 책임을 돌리면서 이를 돌파하는 형국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